1. 시간의 파편화와 기억의 미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유작인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는 시간의 직선적 흐름을 해체한 내러티브 구조로 유명합니다. 영화는 단순히 한 시대의 갱스터 이야기를 재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기억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통해 인간의 삶과 우정을 비극적으로 조망합니다.
영화의 플롯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을 뒤섞으며 전개됩니다. 192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된 소년들의 우정은 1930년대 금주법 시대의 범죄 조직으로 확장되며, 이후 1960년대로 건너뛰어 늙은 ‘누들스’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흐름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파편 속에서 의미를 조립하게 만듭니다.
특히 영화는 시간의 파편화가 곧 인간의 기억 구조와 닮아 있음을 드러냅니다. 누들스가 경험하는 과거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상실의 감정이 덧입혀진 주관적 기억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선택과 배신, 그리고 사랑의 실패를 떠올리며 현재의 자신을 재정립하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왜곡되어 있습니다. 레오네는 이를 통해 시간과 기억이 지닌 불가피한 왜곡성을 영화적 장치로 구현해냅니다.
또한 영화의 엔딩은 여전히 많은 해석을 낳습니다. 누들스가 아편굴에서 미소를 짓는 마지막 장면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으로서, 그가 실제로 과거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한지에 대한 모호성을 남깁니다. 이 모호성은 영화가 단순한 갱스터 서사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켜 줍니다.
2. 우정과 배신, 인간 관계의 아이러니
영화의 또 다른 중심축은 ‘누들스’와 ‘맥스’의 관계입니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하며,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는 형제 같은 관계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인물은 권력과 욕망에 의해 다른 길을 걷게 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배신으로 이어집니다.
맥스는 야망과 권력을 좇아 조직의 중심에 서는 인물로 변모합니다. 반면 누들스는 범죄 세계 속에서도 인간적 도덕성과 우정을 끝까지 붙잡으려 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개인적 갈등을 넘어, ‘인간이 권력과 욕망 앞에서 어떻게 변모하는가’라는 보편적 주제를 대변합니다.
특히 영화에서 누들스가 겪는 배신은 단순히 친구와의 갈등을 넘어, 삶 전체를 부정당하는 경험으로 묘사됩니다. 그가 조직과 동료를 지키려 했던 모든 노력은 결국 맥스의 욕망에 의해 무너지고, 남은 것은 죄책감과 상실뿐입니다. 이러한 배신의 경험은 영화가 제시하는 ‘우정의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우정은 시간이 흐르며 권력과 탐욕에 의해 왜곡되고 파괴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영화는 배신을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필연적 현상으로 그립니다. 금주법과 같은 시대적 배경은 인물들이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되는 토양을 제공하며, 자본과 권력이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우정조차 거래와 배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영화는 인간의 관계가 시대와 권력의 논리에 의해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냉혹하게 드러냅니다.
3. 세르지오 레오네의 미학과 영화적 완성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가 평생 추구해온 영화적 미학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서부극의 전설적 감독으로 알려진 레오네가 갱스터 장르를 빌려 인간 존재와 시간의 본질을 탐구한 결과물입니다.
첫째, 영화의 미학적 완성은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음악과의 결합에서 두드러집니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을 넘어, 기억과 감정을 호출하는 영화적 장치로 기능합니다. 예컨대 오카리나 선율이 담긴 ‘Deborah’s Theme’는 사랑과 상실, 그리고 회한의 정서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며, 관객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각인됩니다. 음악은 곧 영화 속 인물들의 내면적 고백이자, 관객이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둘째, 레오네의 시각적 연출은 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카메라는 종종 느린 패닝과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길게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과거의 기억이 현재 속에 살아 있음을 표현합니다. 아울러 어두운 골목, 오래된 건물, 흐릿한 조명 등은 모두 기억의 불완전성과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 은유로 드러냅니다.
셋째, 영화는 장르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해체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전통적 갱스터 영화가 권력과 폭력, 성공과 몰락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면, 레오네는 그 외피 속에서 ‘시간과 인간 관계의 비극’을 탐구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갱스터 영화의 외형을 지녔지만, 본질적으로는 철학적 사유와 기억의 미학을 담은 예술영화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단순한 범죄 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탐구하는 대서사시입니다. 시간의 파편화된 내러티브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며, 우정과 배신의 이야기는 인간 관계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또한 세르지오 레오네의 시각적 연출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은 이 작품을 시대를 초월한 걸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습니다.
영화가 남긴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인간은 기억 속에서 과거를 되새기지만, 그 기억은 언제나 왜곡되고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관계는 순수한 이상에서 출발하더라도, 권력과 욕망 앞에서는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기억과 우정, 그리고 상실의 경험이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단순히 한 시대의 갱스터 이야기를 넘어,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의 비극’을 탐구한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아야 할 작품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남긴 마지막 미소는 곧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를 담은 미소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