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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리시맨> :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의 고독에 대한 거대한 회고록

by 만봉결아빠 2025. 9. 29.

아이리시맨 영화포스터 사진

 

1. 갱스터 서사의 종착점: 폭력의 허망함과 권력의 덧없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은 전형적인 갱스터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사실상 장르적 공식의 해체와 재조립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구축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작 <좋은 친구들(Goodfellas)>, <카지노(Casino)>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하고 역동적인 범죄 세계의 묘사가 이번 작품에서는 철저히 절제된 시선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프랭크 시런’은 마피아 조직과 노동조합, 정치권력을 잇는 연결고리로 기능하지만, 영화는 그의 성취와 성공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과 배신, 그리고 권력의 작동이 만들어내는 허무와 공허를 보여주며, 갱스터 서사의 마지막 종착점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제시합니다.

영화 속에서 프랭크는 지시를 받으면 그 누구라도 가차 없이 제거하는 ‘실행자’로 묘사됩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며, 그 과정에서 개인적 감정이나 윤리적 판단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효율적’ 폭력성을 영웅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죽음을 거듭 목격하며 결국에는 홀로 남게 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폭력의 끝에는 아무런 보상도 없음을 보여줍니다. 권력의 중추에 있던 이들이 차례차례 죽음을 맞거나 배신당하는 가운데, 프랭크 역시 결국은 늙고 병든 육신으로 요양원에 남겨집니다. 이는 기존 갱스터 영화에서 흔히 보였던 성공과 몰락의 서사조차 부정하며, 폭력의 허망함을 절제된 리듬과 장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2. 시간과 기억의 서사 구조: 회상과 회한의 교차

<아이리시맨>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시간과 기억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영화는 프랭크 시런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노년의 프랭크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며, 때로는 특정 사건의 진실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때로는 애써 침묵하거나 모호하게 표현합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습니다. 즉, 프랭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객관적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며, 회상의 순간마다 진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독특한 내러티브를 구축합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를 시각적으로도 정교하게 구성합니다. ‘디에이징(De-aging)’ 기술을 활용하여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구현한 것은 단순히 기술적 성과를 넘어,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왜곡을 시각적으로 병치시키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관객은 같은 배우의 얼굴에서 젊음과 노쇠함을 동시에 목격하며, 시간의 불가역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특히 프랭크가 지미 호파를 살해하는 장면은 그의 삶의 결정적 순간이자, 끝내 그가 떠안아야 할 회한의 원점으로 남습니다. 그는 이를 잊을 수 없으며, 기억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힙니다. 이러한 시간과 기억의 교차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며, 단순한 갱스터 영화가 아닌, 인간의 기억과 삶의 덧없음을 탐구하는 철학적 서사로 확장됩니다.

3. 인간의 고독과 구원의 부재: 마지막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아이리시맨>의 백미는 ‘고독’의 정서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프랭크는 요양원에서 홀로 남겨집니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고, 동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거나 배신으로 인해 등을 돌렸습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폭력과 권력이 인간을 어디로 데려가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화려한 명예나 두려움의 상징이 아니라, 오직 고독과 공허뿐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프랭크가 신부에게 고백을 시도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뚜렷한 구원을 찾지 못하며, 자신의 죄를 명확히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종교적 구원조차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며, 인간 존재의 궁극적 고독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갱스터 영화의 영웅적 신화를 완전히 해체한 스코세이지의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국 프랭크가 맞이하는 것은 성찰이 아니라 끝없는 침묵과 기다림이며, 이는 폭력과 배신으로 점철된 삶의 마지막이 어떠한 의미도 남기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영화 <아이리시맨>은 단순한 갱스터 영화라기보다, 인간의 기억과 시간, 그리고 고독에 대한 거대한 회고록에 가깝습니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화려한 폭력의 세계를 해체하고, 그 끝에 남는 허무와 쓸쓸함을 집요하게 응시합니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묻습니다. 권력과 폭력이 인간의 삶을 어디로 이끄는가, 그리고 기억과 회한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프랭크 시런의 고독한 마지막이 던지는 울림은 깊고 오래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