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 일상의 균열 속에 드러나는 비극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는 실제 일본에서 발생한 ‘스가모 아이 사체 유기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제작된 작품입니다. 그러나 감독은 자극적 사실의 재현보다는 아이들의 시선과 정서를 중심에 두며, 사건의 충격적 외피보다 내면의 세밀한 결을 탐구하는 데 집중합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특별히 자극적인 장면 없이 시작됩니다. 엄마와 아이들이 평범한 가정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이내 균열이 드러납니다. 네 명의 아이들 중 일부는 주민등록에도 없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며, 그들은 세상과 철저히 차단된 채 아파트 안에 숨어 살아야만 합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러한 설정을 통해 사회 제도와 공동체의 빈틈을 드러냅니다. 아이들은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이웃들과도 교류하지 못하며, 그저 ‘숨어 있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단순히 사회 고발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감독은 아이들의 세계를 따뜻하면서도 차갑게 응시하며, 카메라는 그들의 작은 기쁨과 두려움을 담담하게 따라갑니다. 이렇듯 비극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기보다, 일상의 단편 속에서 조금씩 스며드는 균열을 통해 관객에게 묵직한 충격을 안겨 줍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감독의 태도입니다. 고레에다는 아이들을 불쌍한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고, 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로 묘사합니다. 특히 장남 아키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가장’의 역할을 떠맡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이 책임져야 할 몫을 아이가 대신 짊어지는 비극적 구조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영화는 일상의 작은 틈새에 드러나는 사회의 잔혹한 무관심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묵묵히 질문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2. 아이들의 세계: 성장과 상실의 교차점
영화의 핵심은 아이들이 겪는 ‘강제된 성장’입니다.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버리고, 남겨진 아이들은 스스로를 돌봐야 합니다. 아키라는 남루한 돈을 관리하며 동생들에게 식사를 챙기고, 때로는 아르바이트를 시도하며 생존을 이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급격히 성숙해지지만, 그 성장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긍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른들의 부재와 무책임이 강제로 부과한 것이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짐입니다.
동생들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난감으로 놀고, 사소한 기쁨을 나누며 여전히 ‘아이답게’ 살아가고자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특히 둘째 소녀 유키의 죽음은 이 영화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사회가 외면한 아이들의 삶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상징적 장면으로 기능합니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은 이 순간조차도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연출하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담담히 아이들의 행동을 따라가며, 오히려 관객 스스로 슬픔의 깊이를 체감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태도는 고레에다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관조적 시선’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세계를 보여주며, 그 안에서 성장과 상실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포착합니다. 아이들은 성장하지만, 그 성장은 곧 상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부재를 체험하고, 삶과 죽음의 무게를 감당하는 그들의 모습은 한편으로 인간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조건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의 성장은 희망적 완성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성숙해지는 아이러니를 드러냅니다.
3. 사회적 무관심과 침묵의 책임
<아무도 모른다>의 가장 큰 문제의식은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성찰입니다. 영화 속에서 이웃들은 아이들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개인적 무관심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제도적, 구조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특히 아이들이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로 그려지는 설정은, 사회의 시선에서 지워진 존재가 얼마나 쉽게 방치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엄마의 부재는 개인적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결국 공동체의 침묵과 제도의 한계입니다. 학교, 복지, 행정 시스템 어느 것 하나도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웃들 역시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은 단순히 사건의 은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방관과 무관심이 만들어낸 비극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비판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외치지 않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늘 그렇듯 관객에게 판단을 유보한 채, 담담한 이미지와 상황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절제된 연출이 오히려 더 강력한 울림을 남깁니다. 관객은 아이들이 고립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왜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지 일본 사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전체에 대한 근본적 성찰로 확장됩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단순한 사건 재현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선과 경험을 통해 사회적 무관심과 공동체의 책임을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화려한 연출 대신 절제된 시선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하며, 그 안에서 상실과 성장, 고독과 희망이 교차하는 인간 존재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냅니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지나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고 있는가.’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을 떠나지 않습니다.